저는 바람에 휘날리며 주인이 읽는 이야기를 상상했습니다. 무대는 바다 건너, 시대는 옛날옛적. 주인은 왕자님이고 저는 적국의 공주님이라고 상상해봅니다.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것도 멋지고,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나는 것도 로맨틱하죠. 상상속에서도 주인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주인 인격의 일부니까 당연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일이든 신중해서 그날까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녀의 실수는 겨우 단 한 번. 그런데 만약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면.
주변상황이나 사회구조는 모두 받아들이고 견뎠지만, 자신이 저지른 실수만은 극복하진 못했던 것 아닐까요.
그만큼 아들을 사랑했겠죠.
그래도, 이건 추측에 불과하지만 쓰요시는 팥색 자전거를 사랑하고 싶은 것 아닐까? 그런데 사랑할 수 없어서 초조하다. 이런감정이 아닐까. 아마 맞을거다.
거기까지 상상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쓰요시와 팥색 사이의 문제고 나는 제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날 이후로 쓰요시는 나를 데리러 보관가게에 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버려졌다.
실망했냐면, 그야 당연히 실망했다. 그래도 최악과는 좀 다르다.
쓰요시는 팥색 자전거를 좋아하게 된 거지, 내가 싫어졌거나 질려서가 아니다. 원래부터 나와 쓰요시는 마음이 연결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한 번은 말을 나웠다. 석양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기노모토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노력은 친숙하지않은 단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주인은 상당한 노력가다. 정확히는 인내가다.
어둠을 견디고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고, 고독을 견디고, 제멋대로인 손님을 견디고, 지금은 이렇게 소음을 견딘다.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받아들임이 그의 인생 전부로 보인다. 아직 젊은 그가 그런 인생을 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