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자애로운 아버지에 효자였고,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명으로 꼽힐만큼 대단한 명필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갖출 수 있는 건 다 갖춘 시대의 엄친아였던 것이다.
이완용은 만2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맞는 등 승승장구 했다고 한다.
잘나가는 이완용은 딱히 나라를 팔아먹을, 반역과 매국을 할만한 특별한 동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을사오적, 매국의 대명사로 꼽히게 한것인가?
이완용은 일찍이 원래는 친미였으며, 중간에 아관파천 당시에는 친러 입장을 취한다.
아관파천 당시에 고종은 친일 인사들을 대거 처형하는데, 우리에게 친일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완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친러인사로 매우 높은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
그러다 친미와 친러의 줄을 번갈아가며 타다 두 나라 모두에게서 배척당하고, 러일전쟁 무렵 부터는 친일로 입장을 바꾼다.
이렇게 계속 갈아탄 것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완용은 그저 자신의 평안와 실리를 챙기려는 목적이 의사의 기준이었음을.
이를 더 잘 말해주는 사례를 책은 더 소개하고 있다.
창덕궁에서 15년간 순종 황제의 측근으로 일한 일본 관리 곤도 시로스케가 쓴 <대한제국 황실비사>를 보면, 당대 일본인들은 이완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완용은 철두철미하게 권력을 다루는 정치가일 뿐 정치적 절개를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곤도는 이어 이완용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였다. 일본이 순종을 본토로 불러들여 천황을 알현시킴으로써 조선과 일본 왕실의 주종 관계를 확실히 못 박으려고 노력할 때의 일이다. 순종이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거부하자, 일본 총독이 이완용을 불러 이 일을 맡겼다. 이완용은 먼저 고종을 찾아가 순종의 일본 방문을 여쭈었다가, 고종이 화를 내며 꾸짖자 바로 포기해 버렸다. 그러자 대신 순종의 외척인 윤덕영이 나서서 고종에게 갖은 수모와 협박을 가해 강제로 허락을 받아 냈다. 이처럼 이완용은 절대 무리하지 않고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만약 친일파로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면, 윤덕영이 했던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자는 결코 이완용을 옹호하고자 이것을 쓰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나쁜 사람보다 어리석은 인간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평탄한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이 대세에 순응하며 사는 것은 처세일 뿐이지만, 험한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대세에 순응하며 사는 것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완용이야말로 그 표본이 아니겠는가?
이는 현대 작금의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국이 어려울수록, 능력있는 사람이 개인의 실리만을 취해 산다는 것은 그 위험성이 배가 된다.
지식인은 지식인의 소임을 다해야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상에서 혼자만의 성취는 있을 수 없다.
물론 노력의 여하는 혼자만의 것이라 할 수 있을지라도, 그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에서
주위의 모든 사람과 환경을 소거한다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다 못해, 내가 책을 읽고 무언가 느끼는 것을 예로 들어보면,
내가 책에 익숙한 환경, 이것은 내가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분명히 유리한 환경을 얻은 것만큼 불리한 환경을 얻은 사람도 있다.
내가 조금 더 여유로운 입장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에대한 책임의식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조건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야해. 가 아니라, 적어도 그들의 존재를 생각해야한다는 것.
그런 것을 간과했을 때, 이완용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완용에겐 자신만의 실리와 자신만의 평안을 위하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었다.
그에겐 '나'를 구성하는 것엔 내가 아닌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06. 김옥균
김옥균이 우리 국민은 어리석어서 믿을 수 없다며, 지금 미국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국민을 깨우쳐야 진정 바꿀 수 있다고 말했지만, 미국 대사는 계속 국민의 힘만 강조하더라는 것이다.
...
김옥균이 그토록 믿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훗날 한일병합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살아남은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는 이완용 등과 함께 한일병합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17. 이시영, 이회영
형제들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급히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로 치면 몇 대 재벌 기업쯤 되는 거부 집안이라 재산을 정리하는 데만 반년 이상이 걸렸다. 이회영이 소유한 서울 땅만 현재 명동성당에서 을지로 외환은행까지 6,000여평(현재가치로 수백억 원 이상) 이었고, 장남 이석영은 2만 석지기 부자였다. 당시 1만 석지기 부자가 전국적으로 1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들 형제가 처분한 재산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마련한 돈을 싸 짊어지고 100여 명의 대가족이 아무 연고도 없는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
마침내 형제들이 버티지 못하고 하나 둘 쓰러지더니, 이회영과 이시영만 남고 모두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영양실조에 따른 합병증이었다.
18. 안중근
그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열렬한 이토 히로부미 숭배자였다. '동양이 깨어 일어나 문명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주장은 조선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당시 안중근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주장에 열광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이토 히로부미 환영대회를 열었고, 심지어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러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왔을 때도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 환영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일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꼬투리 삼아 고종을 강제로 내쫓고 순종을 즉위시키자, 이토 히로부미의 주장이 조선 민족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온건파나 데라우치 같은 강경파나, 일본이 어떤 형태로든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21. 의열단
특히 상류사회에 침투하여 고급정보를 얻어 내려고 용모를 단정하고 세련되게 꾸미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최신 유행하는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모자와 머리 모양도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보이는 데 손색이 없도록 갖추었으며, 누구와도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말하는 법과 매너도 익혔다.
그렇다고 이들이 외모만 가꾼 것은 아니다. 테니스와 수영 등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다양하고 심도 깊은 독서를 통해 지적 능력을 겸비했으며, 유쾌하고 활달한 심성이 행동ㅇ으로 드러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했다. 물론 행동 대원 본연의 임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단 하루도 사격 연습과 무기 조작 연습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22. 신여성
박헌영의 여인으로 유명한 주세죽의 이름을 보자. 세죽, 대나무의 기세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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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정종명, ... , 김활란과 나혜석, 그리고 가깝게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이름도 영수다.
이름을 짓는 데도 유행이 있어서 60,70년대에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천편일률적인 이름이 많았고, 그전까지는 일본식 이름인 '자'자 돌림의 영자,미자,순자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에는 오히려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름들이 곧잘 눈에 띈다. 시기별 여성의 지위와 이름 짓기 경향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다.
24. 곽낙원
임시정부가 풍비박산 났으니 어머니(김구의 어머니)가 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임시정부의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돈이 없어 모두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명색이 임시정부 요인이라는 사람이 일기에 '너무 배고프다. 뭐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쓸 정도였다.
어머니는 팔을 걷어붙이고 상해의 고급 주택가 쓰레기통을 뒤져 배추시래기들을 모아 와 죽을 끓였다. 그날부터 요인들을 먹이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구걸을 하든 쓰레기통을 뒤지든 모금을 하든, 어머니가 상하이에 온 뒤로 요인들을 굶기지 않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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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답답한 것 중 하나가 교과서에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는 거의 없고 김활란, 모윤숙 등 친일 여성의 이름만 나오는 것이다. 3.1운동 당시 투옥된 사람 중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로 조선 여성들은 나라를 되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